"내 나이 칠십이고 다 산 몸이 전환을 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니, 어서 법대로 할 것을 바라는 것뿐이오. 나는 죽더라도 조선 사람으로 죽겠소."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의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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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가면 일제 강점 시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으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남궁억선생을 기리는 기념관과 예배당 및 묘소(한서초등학교 뒤 유리봉)가 있다. 기념관에는 남궁억선생의 약력 및 업적에 대한 자료와 사진자료를 소개하고 있으며, 전시실 옆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예배당을 복원해 놓았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한서로667
관람시간 연중 오전9시~6시
휴관일은 매주월요일과 1월1일,설날,추석당일
관람료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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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에 강사로 나가 학생들에게 개화사상과 애국정신을 가르쳤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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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남궁억은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그 때문에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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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남궁억은 무엇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게 각자 할 일에 충실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서 무궁화를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여권의 신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교단을 떠나야했고 고향에 내려온 남궁억은 먼저 모곡리 고향 마을에 교회를 짓고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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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한서 남궁억 선생께서 이 곳에 예배당을 지으시고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무궁화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11월 <무궁화 사건>으로 선생께서 구속되시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뜯겨 폐교된 것을 2004년 6월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그리고 100주년 기념동산 한서교회 (기독교 대한감리회)가 바로 옆에 있어 모곡교회의 맥을 유지해 주고 있다. 한서교회의 옛 교회인 모곡교회 건물에는 남궁억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남녀칠세부동석 시절인지라 가운데 흰 천을 중심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던 당시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옛 교회 풍금이 그대로 남아 있고 선생의 친필 사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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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교장은 학교 뒤뜰에 무궁화 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몰래 나누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려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처럼 독립운동을 하는데 무난한 상징물은 달리 없었다. 남궁억은 무궁화만이 아니라 국어와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그가 직접 쓴 역사책으로<동사략>이 있고 <조선이야기>라는 동화도 국사책이었으며 국사교육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어 보충>이라는 한글책에 국사이야기를 담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궁억의 외로운 민족운동은 1933년 무궁화 십자당사건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모진 일본경찰의 고문을 받아 병이 든 남궁억은 그 여독(餘毒)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의 무궁화정신은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남아 우리의 민족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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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찬송가 580장)
1928년 찬송가집에 수록된 이 곡은 크리스천 독립운동가이면서 관료, 교육자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한서의 ‘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이 그대로 드러난다. ‘서쪽으로부터 배우다’라는 뜻을 지닌 그의 호 ‘한서(翰西)’에도 서쪽의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겨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마 9:37)
1922년 어느 날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은 이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있었다. 예수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솟아났다. 그날 밤 한서는 붓을 들어 이런 노래 가사를 지었다.
- 국민일보 뉴스 (2017.03.22.)중에서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346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