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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릉, 왜 경기도 연천에 있을까?
운영자 기자    2009-11-17 14:54 죄회수  20990 추천수 5 덧글수 6 English Translation Simplified Chinese Translation Japanese Translation French Translation Russian Translation 인쇄  저장  주소복사

신라왕릉은 모두 경주에 있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경주하면 불국사나 신라왕릉과 같은 수많은 신라의 유물과 유적들이 모여있는 가장 인기있는 수학여행지라 떠올리기 마련이다. 시조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대에 걸쳐 천년이라는 긴 세월 신라를 다스려온 왕들의 무덤은 대부분 경주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보통 신라왕릉은 모두 경주에 있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라의 마지막왕, 천년의 역사 신라를 스스로 끊어야 했던 비운의 경순왕묘는 선왕들의 묘와 멀리 떨어진 경기도 연천에 위치해 있다.

우연히 취재차 경기도 연천을 들렸던 나는 경순왕의 묘가 왜 이 먼 한탄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 국사 공부를 소홀히 해서일까, 이미 경순왕이 어째서 이 곳에 묻혔는지 아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의 짧은 역사지식으로 인한 궁금증은 뒤늦은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내 머리속의 신라 왕릉은 경주의 거대한 봉분만을 떠올리고 있었고 눈앞에 보이는 경순왕의 왕릉은 조선시대 어느 양반댁 무덤이라 해도 될 만큼 다른 신라왕릉에 비해 구석진 장소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묘


삼국을 통일한 신라, 천년의 역사

경순왕을 이야기 하기 전에 신라가 어떠한 나라였는가를 가볍게 짚어보자. 신라는 BC57년 시조 박혁거세가 건국하여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천년(992년)을 이어온 나라다. 법흥왕(514~540)때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고 법흥왕의 외손자인 진흥왕(540~576)은 대가야를 정복하고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신라가 강성한 군사력을 키워나가 훗날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632~647)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서 평가받는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녀의 삶을 재조명 하고 있다.


▲ 드라마 선덕여왕,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만든 당찬 여왕으로 평가 받는다.


드라마 내용중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바로 미실(고현정 분)과 덕만(선덕여왕, 이요원 분)의 마지막 싸움. 덕만(선덕여왕)과의 싸움으로 미실이 대야성에 갖힌채 위기에 처하자 백제와 대치중에 있던 속함성의 2만 병사가 미실을 돕기위해 대야성으로 진군하려한다. 하지만 미실은 자신을 도우려는 2만의 병사를 거절하고 회군 시킨다. 백제군이 그 틈을 타고 신라에 침략해 올 것을 염려한 것이다. 결국 미실은 덕만에게 항복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언제든 빈틈이 있으면 먹고 먹히는 당시 삼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여왕의 자리에 오른 덕만 또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고자하는 염원을 담은  황룡사 9층 석탑을 세우고 별자리를 읽어 나라의 운세를 점치는 첨성대를 세웠으며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는데 힘썼다. 나라를 지키기위한 선덕여왕의 이러한 외교정책은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 기틀이 되었다는게 역사학자들의 평가다.

이런 신라 선왕들의 노력이 빛을 발해 무열왕(654~661년)에 이르러 신라는 백제를 멸망(660)시키고, 다음 왕인 문무왕(661~681)대에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668) 시키며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했으나 나당전쟁(670~676)을 통해 당을 몰아내고 통일국가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른다. 이렇게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전제왕권을 확립하며 문화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나 그 뒤 점차 골품제도가 붕괴되고 족당이 생겨나며 호족세력과 장보고와 같은 해상세력이 힘을 기르는 등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 전제왕권이 흔들리고 국력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진성여왕(887~897)대에 이르러 과도한 부역과 조세, 흉년으로 인해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한다. 이를 발판으로 궁예(후고구려, 901~918), 견훤(후백제, 900~935)등 세력이 일어서며 사실상 삼국통일은 와해되고 신라는 분열되어버리고 만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금성을 함락하고 당시 신라의 왕인 경애왕(924~927)을 인질로 잡았으나 경애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에 견훤이 내세운 신라의 다음 왕이 바로 경순왕이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경순왕은 신라 천년 역사의 참담한 끝맺음을 해야 했던 왕이다. 후백제의 침공으로 영토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힘을 잃어버린 경순왕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자 견훤과 대치중이던 신흥국 고려의 왕건에게 손을 내민다. 정벌한 지역의 백성들을 규휼하는데에도 힘을 쓰는 등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키워가는 왕건에게 경순왕은 신하들과 의견을 모아 항복(935)을 하게 된다. 이로서 천년을 이어온 신라는 역사의 뒤안 길로 남게 된 것이다.


▲ 드라마 태조왕건의 한 장면, 왕건은 민심을 기반으로 진정한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신라를 손쉽게 흡수한 왕건은 경순왕에게 유화궁을 하사하고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주어 사위로 삼는다. 또한 경주의 사심관이라는 벼슬까지 내리게 된다. 이로서 경순왕은 골치아픈 망국의 왕 자리를 버리고 고려의 대접받는 신하로, 또 왕의 사위로 마음 편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는 고려에 항복후 43년을 더 살다 978년 세상을 떠난다. 이 소식을 접한 신라의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에 장례를 모시자 하였지만 고려의 조정에서는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반대하여 신라왕묘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경기도 연천의 고량포 나루터 뒤 나즈막한 구릉에 묻히게 된 것이다.


▲ 신라왕묘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경순왕묘. 쓸쓸함이 감돈다.

경순왕릉은 그 뒤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1747년 조선 영조때 후손들이 묘지석을 발견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한국전쟁 발발로 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국군에 의해 재발견되어 경주김씨 문중에서 봄, 가을 두차례 제례를 지내고 있다. 경순왕릉의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는데 왕릉처럼 높다란 강(岡)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때 만들어 진 것으로 일반 사대부 가문의 묘와 다를바 없다. 인적이 드문 남방한계선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 비해 작고 초라하여 쓸쓸함 마저 감돈다.


▲ 경순왕릉 앞을 지키는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만이 그 쓸쓸함을 애써 달래주고 있다.


신라는 죽지 않았다. 신라 후예 이야기.

경순왕의 태자는 신라 황조 천년을 하루 아침에 버릴 수 없다며 고려에 항복을 반대했다. 결국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며 개골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전해지며 평생 베옷을 입었다 하여 마의태자라고 불린다. 경순왕의 막내 아들인 범공 또한 고려로 투항하지 않고 화엄사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평생 베옷을 입고 산속에 숨어살았다는 마의태자에 대한 행적은 의견이 분분하다. 신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따르는 신하들을 이끌고 고려에 저항하며 방어하기에 용이한 강원도 인제지역으로 향했다는 설이 있는데, 인제에는 마의태자 유적지비가 있고 옥새를 숨겼다는 옥새바위며 마의태자의 이름이 새겨진 5층 석탑 등 실제 마의태자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게다가 얼마전 방영한 KBS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2009/9/5 방송)편에서는 놀라운 신라 후예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 KBS 역사스페셜의 한 장면. 신라의 후손이 금을 세웠다는 가설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대륙 중원에서 한족을 밀어내고 금나라를 세운 금태조 아골타에 대해 금나라 정사는 물론, 금나라 건국시 송나라에서 씌여진 금나라 견문록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적혀있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로 왕(王)과 같다. (송막기문)


▲ 금태조 완안 아골타. 완안은 한자표기로 金이다. 송막기문에는 金이 왕을 뜻한다고 한다. 아골타의 넷째 아들인 김올출(金兀朮)의 후손들은 감숙성 경안현에 모여살며 자신들의 조상인 완안올출을 김올출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금태조 아골타가 다름아닌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마의태자가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에 언급이 되는데,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에 보면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김씨나라라는 명칭으로 금(金)이라 했다... 아골타는 김행의 후손이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정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여기서 김행이라는 인물은 마의태자의 아들이라는 설이다. 부안김씨족보에 따르면 금나라의 시조 김행이 마의태자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으나 마의태자의 나머지 두 아들은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에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아골타의 시조가 마의태자와 연관이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은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했을 때 시기가 신라말기, 고려초라 한다. 나라를 잃은 신라의 유민들이 북쪽을 향했을 시기라는 것. 조선 유학자인 김세렴이 남긴 동명해사록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

경순왕 김부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또한 1977년 청나라의 건륭제가 43명의 학자에게 지시하여 편찬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기록에도 이와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금의 국호가 신라왕성에서 왔다. (新羅王金姓相傳?十世則金之自新羅來無疑建國之名亦應取此)
시조가 신라에서 왔다. (完顔金始祖自新羅來居完顔部因以爲氏)

이밖의 다양한 사료를 통해 금나라를 세운 금태조 아골타가 신라의 후예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비록 신라는 그 이름을 잃었으나 신라의 후예들은 드넓은 대륙으로 진출해 활약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금나라를 세운 것이 마의태자의 자손이라는 점이나 신라의 김(金)씨라는 설에 대해 사학자들간의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천년을 이어온 신라가 고려에 순순히 흡수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학자는 없다. 신라의 유민들과 그 후예들은 북방으로 옮겨가 천년 신라의 재건을 위해 힘썼음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선왕들이 묻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연천의 인적이 드문 낮은 야산에 묻힌 경순왕. 왕건의 배려로 왕의 사위가 되고 벼슬을 얻었으니 편안한 여생을 보냈으리라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천년을 이어온 신라를 자신의 손으로 고려에 바친 신라의 죄인이요. 자신의 아들들도 그를 떠나 버렸으니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후예들이 금나라를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며 위안을 얻었을런지 모른다.


연천관광 필수코스, 경순왕릉

경기도 연천은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세계가 주목하는 구석기유적이 발견된 곳이다. 매년 5월 구석기축제가 열리고 있어 자녀들을 위해 꼭 한번쯤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구석기축제를 보고 나오며 잠시 들릴 만한 곳이 바로 오늘 소개한 경순왕릉이다. 구석기축제가 열리는 구석기유적지에서 차로 30분 남짓 아름다운 한탄강을 끼고 달리다보면 도착하는데, 남한 유일의 고구려성터인 호로고루도 경순왕릉 근처에 위치해 있다.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임진강 방어선을 관장하는 가장 높은 지휘관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이곳 전망대에서 시원스럽게 내려다보는 한탄강의 절경과 해질녘 낙조는 그 어디에서 볼 수 없는 운치를 느끼게 한다.


▲ 경순왕릉에서 차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호루고루 성터가 있다.


▲ 고구려 성터인 호로고루의 전망대 가는 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강도균 취재팀장 / [email protected]

태그  경순왕묘,연천관광지,경기도 관광,구석기축제,호로고루,태조왕건,마의태자,신라왕묘,선덕여왕,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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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azz   2011-08-07 21:57 수정삭제답글  신고
우리 가족 역사공부 겸해서 주말에 한 번 꼭 가 보고 싶네요.
이 글을 미리 읽고 가니 유익한 여행이 될 듯..
딱풀   2010-01-17 03:17 수정삭제답글  신고
연천.. 뭔가 있긴 있나 봅니다. 어떻게 구석기 유물이 그렇게 고고학 가치있게 발견될 수가?? 신라의 끝왕이 거기까지 옮겨가 묻히셨을까?? 그런데 지금은 군인들이 매일 훈련하는 든든한 고장이 됐을까? 한탄강아 말해다오.
broomstick   2009-11-23 09:47 수정삭제답글  신고
구석기 축제도 대단한 의미가 있다던데요? 역사공부하는 김에 구석기공부도 하고 현대사의 비극의 산물 비무장지대 보는 태풍전망대도 보고.. 연천군에 테마관광을 떠나야겠네요..
yellow   2009-11-23 09:26 수정삭제답글  신고
이 글을 읽으니 역사공부와 함께 드라마도 생각나고.. 연천 갈 때, 경순왕릉과 호로고루 반드시 들르고 싶네요.
섬진강   2009-11-19 18:28 수정삭제답글  신고
잘 봤습니다. 우리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게 되니, 더욱 역사에 대해서 궁금해 지는 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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